평소 운동을 할때 충분한 준비운동 없이 배드민턴이나 골프를 할때 팔에 갑자기 부담을 주면 근육에 무리가 갈 수 있습니다. 관절에 이상이 생기면 붓거나 외형상의 형태에 이상이 보이지만 상완삼두근 근육의 파열시 외형상의 변화가 안보일 수도 있습니다. 외형상의 유무와 상관없이 삼두근 파열시 그쪽 부위에 통증을 느끼게 됩니다. 특히 팔을 하늘로 높이 펴거나 물건을 들고 머리 위쪽으로 올릴 때 심한 통증을 느낍니다.
근육파열 원인
가장 큰 원인은 무리한 운동입니다. 또한 반복적으로 무리한 동작을 할 때에도 발생합니다. 상완삼두근의 파열은 테니스의 백핸드 스트록 자세, 골프스윙시, 팔굽혀펴기나 근력운동의 과한 시도 등의 행위에서 초래할 수 있습니다.
이 때에는 외과의원에서 MRI를 찍어 부상부위를 관찰하고 더 정확한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자기공명관절조영술을 받아봐야 알수 있습니다.
가장 효과적인 근육파열의 치료방법은 해당부위의 근육을 안쓰는 것입니다. 부상정도에 따라 부목으로 고정하고 물리치료와 약물치료를 실시할 수도 있습니다. 부상통증이나 운동능력이 회복되지 않을 시 주사치료도 할 수 있습니다. 심하면 관절내시경치료도 받아야 한다고 전문가는 조언합니다. 하자민 대게의 경우 해당부위의 근육을 몇일동안 안쓰고 소염제를 바르고, 자신의 반대쪽 손으로 가볍게 맛사지를 하면 낫습니다.
예방법
예방법은 역시 준비운동입니다. 상완삼두근의 준비운동은 발꿈치 부위를 가볍게 늘리는 것입니다. 자신의 팔을 하을위로 뼜은 후 한쪽 손바닥을 등판에 닿게 하며 가볍게 팔꿈치를 눌러 근육을 이완시킵니다. 모든 주요 관절이나 근육은 이렇게 가벼운 이완동작을 반복적으로 함으로서 준비를 시키는 것이죠.
박태준의 인생은 크게 세가지로 나뉩니다. 군인 박태준, 기업인 박태준, 정치인 박태준입니다. 군인으로 시작해 기업인을 거쳐 정치인으로 은퇴한 박태준은 대체로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는 평을 받습니다.
출생과 군인
부산 기장군에서 1927년 출생한 박태준은 1945년 와세다대학에 입학하였으나 조선 해방으로 귀국한 이후 경비사관학교에 입학해 소위로 임관합니다.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경비사관학교 당시 교관이 박정희였고, 박태준은 학생이었으니 박정희와는 사제지간으로 인연을 시작한 것입니다. 박정희는 박태준을 마음에 들어했고 이후 심복으로 키우게 됩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이후 연대장 등을 하며 군인생활을 이어 가다가 5.16쿠테타로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박정희의 비서실장이 됩니다. 소장을 진급하면서 전역하게 됩니다.
기업인의 삶
박태준은 대한중석 사장으로 임명되면서 기업인의 길을 걷게 됩니다. 대한중석은 당시 텅스텐공장이었으나 현재는 워렌버핏이 투자한 대구텍으로 사명이 변경되었습니다. 이후 유신정권은 제철소를 건설하는 계획을 세웠고 제철소 건설에 박태준을 임명합니다. 포항제철과 광양제철은 박태준의 성실함과 섬세한 계획으로 성공적으로 건설되었으며 국가 기간산업으로 현존하는 포스코를 있게 하였습니다.
독재정권 시절 박정희가 권유한 국회의원도 마다하고 기업인의 삶을 선택한 박태준은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자 포항제철의 경영권 방어 차원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해 당선됩니다. 정치는 하는둥 마는둥 하고 여전히 포철에만 관심을 두는 국회의원 박태준은 노태우 정권까지 이어 집니다. 김영삼 정부에 들어서기 전에 정계은퇴를 했고, 김영삼 정부는 국세청을 통해 세무조사를 하게 됩니다. 청렴한 삶으로 알려진 박태준의 재산이 360억이 넘는다고 발표했고 검찰은 포철 계열사에서30억을 받은 협의로 기소합니다. 1995년 재판도중 특별사면으로 풀려나 일본으로 출국합니다. 그러다가 1997년 정계에 복귀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됩니다. 이후 자민련 총재로 활동하다가 2000년 DJ정부에서 국무총리로 임명되지만 부동산 명의신탁 의혹으로 4개월만에 사임합니다. 2011년 향년 84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박태준의 부동산 명의신탁
박태준은 70년대 중반부터 조창선이나 친인척 명의로 서울 등에 많은 부동산을 명의신탁하여 부동산을 소유하였습니다. 알려진 명의신탁 부동산은 서울 중구 오장동에 있는 센추리빌딩, 경일주차빌딩, 역삼동 대지, 신사동 빌딩, 을지로 빌딩입니다. 조창선의 누나와 박태준의 부인 장옥자의 친분을 통해 연이 되었으며, 조창선은 박태준의 재산관리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조창선의 재산은 2013년 기준 100억대였습니다. 일요신문 인터뷰를 통해 재산형성과정을 설명했습니다. 72년에 범한산업을 경매를 통해 낙찰받은 이후 돈을 벌었고, 73년 오일쇼크 잏 부동산을 구입하기 시작합니다. 경천기업 대표로 있으면서 주차빌딩 운영 및 부동산 임대료를 받으며 살고 있다고 합니다. 조창선의 재산도 많으며, 박태준의 재산도 많은 것은 사실이고, 박태준은 많은 부동산의 일부를 자식들에게 증여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유신헌법에 따라 대통령의 추천으로 선출된 국회의원들이 구성한 원내교섭단체를 유정회(유신정우회)라고 합니다. 국회의원을 박정희가 뽑았고 그 의원수만 73명이었습니다. 박정희당을 박정희가 만들고 그 당의 국회의원도 박정희가 뽑았습니다. 두산백과에서의 유신정우회는 이렇게 세련된 표현으로 풀이합니다. 유신정우회란 박정희 대통령의 지도이념을 입법활동에 구현함으로써 유신헌정체제의 수호 및 발전을 담당합니다.
유신체제의 뜻
박정희가 수립한 제4공화국의 별칭을 유신공화국 또는 유신체제라고 합니다. 유신이란 유교용어로 '새로 고친다'라는 뜻입니다. 쿠테타를 일으킨 박정희는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단체를 구성해 유신헌법을 만들고 이를 통해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독재를 시작합니다. 입법, 행정, 사법 모두 대통령이 장악하는 독재정권을 출범시킵니다.
유신헌법 주요내용
유신헌법을 제정한 배경은 이러합니다. 72년 박정희는 본인이 3선을 하기 위해 기존 헌법을 개헌한 이후 대통령선거에 출마합니다. 근소한 차이로, 가까스로 3선 대통령에 당선되자 위기감을 느껴 72년 10월 국회를 해산시키고 비상계엄령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나서 장기독재를 위한 유신헌법을 선포합니다. 전술한 대로 유신헌법은 3권 분립을 거부하고 입법, 사법, 행정권을 대통령이 갖게 됩니다. 3선 제한이 없어져 영구집권이 가능하게 하고, 대통령이 곧 의장인 통일주체국민회의가 대통령을 선출하도록 합니다. 또한 대통령이 국회의원의 1/3을 추천하고, 대법관까지 임명합니다. 유사시 긴급조치를 발동할 수 있는 권한도 갖습니다.
유신헌법과 유신정우회
유신정우회는 박정이 대통령의 영향범위 내에서 통제 가능한 인사를 선정하였습니다. 당연히 그의 하수인으로 구성하였죠. 유정회는 1~3기까지 이어갔으며 박정희가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에게 암살되면서 막을 내리게 됩니다.
유신헌법 53조에 따라 대통령이 내릴 수 있는 특별조치입니다. 이 긴급조치로 유신헌법을 반대하거나 부정하는 일반국민을 중앙정보부 또는 경찰이 체포하여 최고 15년 이하의 징역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정부정책이나 대통령을 욕하는 일반시민은 중정에 끌려가 모진 고초를 당했으며, 야당 국회의원들에 대한 탄압조 이 긴급조치를 통해 이루어 졌습니다.
최경록과 박정희 유신정권
육군 준장으로 6.25 전쟁을 치루기도 한 최경록은 5.16군사정변 이후 육군중장으로 예편합니다. 1963년에 백악관 앞에서 군정 반대시위까지 벌이기도 한 그는 미국에서 돌아와 군사정권과 손을 잡고 교통부장관과 유신정우회 소속의 국회의원을 지냅니다. 신군부에서도 주일대사, 민주평통, 재향군인회에서 활동하며 현직을 지내다가 2002년 81세로 별세합니다. 당시에는 박정희 군사정권에 항거하며 투쟁하다가 회유와 협박으로 불복하고 정권에 협조하여 요직을 차지한 인물들이 있었으며 그 중 하나가 유신회 국회의원까지 지낸 최경록입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백선엽은 1948년 육군본부 정보처 대령 시설 군내 좌경인사 숙군작업시 박정희를 선별하여 징계를 내립니다. 이때 박정희의 구명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 남로당 총책으로 지목되어 사형선고까지 내려진 박정희를 구하게 됩니다. 박정희는 백선엽의 도움으로 불명예 제대 후 다시 국군 정보국 군무원 으로 근무하도록 돕습니다. 이후 6.25
전쟁이 발발하여 박정희는 정보국 제1과장으로 전쟁에 참여하고 백선엽은 국군 제1사단장으로 참전합니다. 전후 1960년까지 군생활을 하다가 퇴역 후 외교관으로 활동합니다.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교통부장관을 하다가 충주비료 사장, 한국종합화학공업 사장 등 경제계 활동을 합니다. 박정희 정권 붕괴 후에는 선인재단을 통해 교육사업을 하였으나 비리, 부패행위로 이사장에서 물러 납니다. 아직도 백선엽 장군은 생존해 있습니다. 1920년생이므로 100세의 나이입니다.